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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의 詩장바구니-⑭] 세탁기

기사승인 2019.06.17  14: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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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는 남편을 세탁하려는 존재, 남편은 아내에게 세탁을 당하는 존재"

   
▲ ⓒ부천타임즈

세탁기
이동호

아내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한다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내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내 속으로 신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곤 했다
내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원하는 내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이다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란다에서
말 잘 듣는 강아지풀처럼 뽀송뽀송
잘 건조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동호 시인이 쓴 「세탁기」는 세탁기를 통해서 이 시대의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는 첫 행은 보편적 부부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주체는 아내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깨끗하게 빨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며 빨려고 합니다. 남편은 주도권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 안간힘을" 쓰기도 하지만 아내의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풍경은 이 시대의 보편적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풍경 속에서 가정이 이루어지고, 또 이런 풍경을 연출하지 못하는 가정은 어긋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편은 참 착합니다. 아내를 위해서인지, 아내에게 밀려서인지, 대세로 굳어버린 관계를 거역할 수 없음인지, 아니면 노후를 위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요. 그런 남편은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하고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남편의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 졸졸 시냇물이 흐"릅니다.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남편의 내면 “속으로 산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립니다. 남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남편의 "주변을 떠"돕니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 다니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은 아내가 남편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하는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그 오랜 시절을 지나는 동안 남편에게도 아내로 인한 희노애락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부활"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어서 "젖은 아내"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주도적 공격으로 시작된 공세 게임에서 남편은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입니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보면서 탈수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남편은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란다에서 / 말 잘 듣는 강아지풀처럼 뽀송뽀송 / 잘 건조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빨래를 햇볕에 말리면 건조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요, 게임도 아내의 완승으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요. 승자가 누구일지 궁금하지만 공격한다고 해서 승자가 아니고 공격만 당한다고 해서 패자도 아닙니다. 승자를 따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빨래하기 위해 존재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세탁을 당하면서도 "지구처럼" 내내 "자전"하며 "꽃"과 "고사목"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의문이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이미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고, 아직 모른다면 머지않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동호 시인이 본 풍경 속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잔상이 남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세탁하려는 존재고, 남편은 아내에게 세탁을 당하는 존재라는 것이요. 잔상이 오류인지, 일시적인 것인지, 흔한 풍경인지, 그 반대의 풍경도 있는지는 당신의 형편과 판단에 맡겨두기로 합니다.

다만 이 시대의 어떤 남편은 이제 세탁기까지 돌리게 되었으면서도 결코 아내를 그 세탁기에 넣고 돌리지는 못할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 시인 이종섶

이종섶(시인,평론가)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민들레예술문학상, 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시집으로 <물결무늬 손뼈 화석>,<바람의 구문론>이 있다.'2019 제1회 목일신아동문학상' 운영위원

이종섶 mybach@naver.com

<저작권자 © 부천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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